요약하는 게 너무 어렵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 가리는 게 아직 안되는 듯.


중국현대사상론 - 리쩌허우(이택후)


1.
계몽과 구망의 이중 변주

1915
'청년'(이후 '신청년')에서는 천두슈를 위시하여 여러 사람들이 각종 논설과 백화 시문을 내놓아 공자와 전통 도덕을 처음으로 전면적으로, 맹렬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도덕 혁명과 문화 혁명을 내세운 신문화 운동이 일어났다. 사실 이 운동은 탄쓰퉁, 옌푸, 량치차오 등 이전 단계에서 추구한 계몽 운동의 연장이었으나, 신문화 운동의 계몽 요구와 주장의 철저성, 전체성은 이들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당시 민족 모순과 계급 투쟁 등 절박한 사회, 정치 현실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환경 역시 이것이 하나의 '운동'으로 널리 주목받고 퍼진 요인이었다. 그러나 정치 투쟁(혁명)이 계몽과 문화를 압도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신해 혁명으로 황제 권력이 무너지고 낡은 봉건 사고도 권위를 잃었으나 정국은 엉망으로 치달았고 사상의 혼란이 극심하며 이념의 공백 상태가 나타났다. 또 기존의 체제와 문화가 무너지면서 강력한 보수, 완고 세력이 공자와 경서를 강조하고 황제권을 부활하는 등 시대착오적인 풍조도 나타났다. 젊은 지식인들도 대부분 이렇듯 막막한 현실 앞에서 침묵하였다.

 

이런 가운데 천두슈가 가장 먼저 민주주의와 과학을 외친다. 천두슈는 1916년에 발표한 글에서 '다수 국민의 운동'을 제기하였다. 양무 운동이나 개혁, 혁명 운동과 같은 이전의 다수 국민의 운동은 반제나 반청조 같은 목적을 실현하고자 대중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그리하여 '다수 국민'은 민주적 권리도 얻지 못하고 자각적인 민주적 요구를 내걸지도 않아 자연히 소수 사람들만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1912년에 들어선 중화민국 역시 실질은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인민은 여전히 어진 황제나 청렴한 관리를 기대하는 마당에 어떻게 정치 진보나 국가의 부강을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민중을 계몽하여 이들이 스스로 깨달아 민주주의를 쟁취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렇듯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삼강학설과 같은 전통 관념(윤리적 깨달음)과 반드시 결별해야 하며, 나아가 서구의 자유, 평등, 독립 학설이란 최후의 깨달음이 되는 깨달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고유의 전통을 버리고 서구 문화를 전반적으로 수입하자(全盤西化)는 것이 신문화 운동의 기본 특징이었다. 아울러 이 시기의 선진 지식인들은 더 이상 정치가 아닌 문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천두슈는 청년잡지를 출판하면서 이런 점을 분명히 밝혀 시정을 비평하는 것이 宗旨가 아니다라고 쓴 바 있다. 또 신문화 운동의 여러 주도 인물들은 앞 단계의 캉유웨이, 량치차오, 쑨원, 황싱과 달리 운동 초기에는 정치적인 인물이 아닌 순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신문화 운동의 자아 의식이 결과 정치가 아니라 문화에 집중되었다 하더라도 여기에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신문화 운동의 목적은 국민성을 개조하고 낡은 전통을 파괴하는 것으로, 즉 사회 진보의 기초를 이념적 사상 개조, 민주주의적 계몽 사업에 두고 있었다. 그 속에는 정치적인 요소가 명확하게 혹은 은연중에 개입되어 있었다. 즉 계몽의 목표, 문화의 개조, 전통의 포기는 여전히 국가와 민족을 위해, 중국의 정치와 사회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또 신문화 운동은 천하의 일을 자기 일로 생각하는중국 사대부의 고유한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외세에 저항하고 부강을 추구하는 중극 근대의 구망(救亡)의 주된 흐름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것들은 결코 개인의 천부적 권리’, 즉 순수한 개인주의적 자유, 독립, 평등을 쟁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따라서 본래 개인주의의 기초 위에서 세워진 서구 문화를 소개하고 수입하여 전통을 타도하고 공격할 때에도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지니고 있던 위와 같은 집단주의적 의식과 무의식과 더불어 국가 대사와 백성의 고통에 대단한 관심을 쏟는 사회, 정치 의식과 무의식적 전통에 부딪혔다. 5.4 전후에 공자가 격렬히 공격받은 까닭은 위안스카이나 장쉰 등이 자신의 황제 체제 부활의 도구로 공자를 이용한 탓도 있었다. 이 밖에도 전통 학문에 정통하던 지식인들이 철저히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려 한 것은, 중국 문화에는 종교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어 맹족적인 신앙의 속박을 받지 않고 자기 개선을 적극 추구(自强, 日新)할 수 있었으며, 모든 것에 대해 이성적으로 고려함을 자기 개선의 표준이나 귀결로 삼았던 것과 관계가 있다. 즉 전통적이건 외래적이건 모두 인간의 이지(理知)에 따라 재단, 판결하고 선택, 사용하는 실용이성(實用理性)은 중국인이 수천 년 동안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기본 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흥미롭게도 공자와 유교에 반대하던 이들 지식인들이 의식하건 하지 않건 여전히 국가 대사와 백성의 고통에 관심을 쏟는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자신의 임무라 생각하는 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렇듯 계몽의 여러 목표를 삼고 전통을 비판하는 특색을 지닌 신문화 운동은 5.4 운동을 계기로 구망을 위한 반제 정치 운동과 만나 거대한 기세를 이루었다.

 

5.4 운동 전부터 학생 애국 운동은 중국에서 뿌리가 깊었는데, ‘천하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라는 말처럼 유교적 윤리 의식이 그 밑바탕을 이루었다. 1918년 학생들은 신문화 운동과 병행하여 신조사, 국민사 등 유명한 애국 구망 단체를 조직하여 반제 구국을 선전했다. 신문화 운동의 핵심 인물과 원래 애국 반제 운동을 한 사람들이 하나로 합쳐져 5.4 운동의 지도층을 이루게 되었는데, 따라서 당초 정치과 거리를 두고자 했던 신문화 운동의 주장은 결국 정치 투쟁으로 되돌아왔다. 계몽이라는 주제, 과학과 민주주의라는 주제는 다시 한 번 구망, 애국의 주제와 충돌하여 서로 뒤엉켰고, 발걸음을 함께하게 되었다. 당초 계몽이 구망에 곧바로 파묻힌 것은 아니었다. 이후 잠시간 계몽 운동은 구망 운동의 힘을 빌어 그 위세를 키워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중소 도시로 널리 퍼졌다. 또 계몽은 구망에게 사상, 인재, 대오를 마련해 주었다. 두 운동의 결합은 마침내 중국 전체의 지식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다른 한편, 학생 애국 운동이 전례없이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정부와 정부가 옹호하는 낡은 전통의 권위와 통제에 충격을 가하여 계몽이 확대되도록 길을 터주었다. 이들은 전통의 그물을 뚫고 서구 문화를 소개하고 봉건 사상을 공격하여 개인의 자유, 독립, 평등을 쟁취한다고 말하였는데, 원래 서구 개인주의로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적 집단주의를 대체하려고 한 것이 바로 천두슈가 1916년에 내놓은 신문화 운동의 주제였다. ‘가족분위주의를 바꾸고 전통적인 윤리를 부정하자면 우선 를 부정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 체제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충군’(忠君)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지만, 민국 이후에도 의 윤리가 잔존하고 있었는데, 윤리가 지탱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지식인들은 를 공격하기 위하여 첫째로 계몽적인 방법으로 개인을 대가족에서 해방시켜 자유, 평등, 독립의 지위와 권리를 추구하게끔 하고, 둘째로 의 기초임을 폭로해야 했다. 이 두 방법은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 비판할 때에는 긴밀하게 뭉쳐 있었다. 천두슈는 가 가족을 비호하여 개성을 희생시키고 전제 정치의 기초라고 공격하는데, 특히 가까이는 부친을 섬기고 멀리는 군주를 섬긴다는 유학의 삼강오륜에서 효와 충이 내재적인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순자의 학문’(荀學)을 크게 매도하면서 명교’(名敎)가 인간성을 말살하고 군주를 위해 복무한다는 탄쓰퉁의 비판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다. 다만 직접 공자를 공격하여 비판이 더욱 철저하고 격렬해졌으며 정치 비판과 개성 해방이라는 두 주장 가운데 개성 해방이 훨씬 두드러졌고 아울러 개성 해방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젋은 세대 지식인의 행위 양식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앞 세대 선진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가족 제도를 격렬하게 비판하고 부정하였으나 행위상으로는 여전히 가족에 대해 전통 규범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5.4 이후 청년 세대는 처음으로 서구식 변혁을 용감하게 실천하고자 했다. 가족 전통에서 벗어난 혼인의 자유나 여성 단발, 남녀 공학 등 여성 해방이라는 관념 혁신은 개성 해방의 문제인 동시에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성 해방으로 정치적 압제, 간섭에 타격을 입혔고 보수적인 도덕 옹호자들은 이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반항 외에도 당시 상당한 특색을 지닌 행위 양식은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서로 연계를 맺고 단체를 조직하여 진리를 추구하고 이상을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신민학회’, ‘소년중국학회’, ‘각오사’, ‘신조사’, ‘국민사’, ‘공학회’, ‘공학회등 각종 소규모 단체들은 새로운 이상 사회를 실천적으로 지향하였다. 당시 청년들은 모더니즘의 당혹감, 고독감, 귀속 의식의 상실 같은 것이 없었으며, 반항하기 위한 반항, 순전히 비판적이거나 파괴적인 훼손을 꾀한 것도 아니었으며 미래를 낙관하며 긍정적인 이상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각종 사회주의가 청년 단체에서 유행하였다. 이들은 당시 어둡고 낙후된 중국의 현실을 초월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선진적이지만 해결해야 할 수많은 병폐를 안고 있던 당시 서구 자본주의 역시 초월하고자 하였다. 사회주의의 아름다운 이상에 경도된 청년들은 공독호조단이나 신촌 실험과 같은 이상 사회를 실험하였다.

 

결론적으로 가정에서 뛰쳐나온 개인의 반항과 이상 사회를 조직하려는 집단 의식은 통할 수 없었다.

 

2. 계몽의 구망 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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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련
    2010/03/17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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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 요약은 문단마다 한문장으로 줄이는 것이 기본이다. 이택후의 주장은 무엇인가? 세 줄 요약을 해봐.
    • 2010/03/17 15:53
      댓글 주소 수정/삭제
      신문화 운동의 지식인들은 전통을 전면적으로 비판, 부정하고 민주주의와 과학과 같은 서구 문화를 수입하여 대중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한편으로 신문화 운동은 유교적 정치 참여 의식 및 집단주의와 더불어 민족적 위기 의식인 '구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신문화 운동의 문화 계몽 노선은 5.4를 전후로 반제 구망 노선과 결합하여 상호 작용하였다.


      이 사람의 논지가 그리 복잡하진 않은데, 전통이 계몽/구망에 준 영향에 대해서는 좀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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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성향 시험

2010/02/10 16:22

서양편

상식에 충실한 소시민 타입

양쪽을 두루 살피고,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택하는 타입니다. 다같이 땡땡이 치고 놀다가도 어느샌가 자리로 돌아와 제 할일을 찾는 균형잡힌 당신은, 매력적이기보다는 밋밋한게 사실. 그러나 극단의 사유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몹시도 어려운 일이란 것을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집대성의 철학'을 전개하거나, 흐름을 통합하는 사유를 펼쳤던 이 부류의 철학자들은?
=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피히테, 당신

- 밋밋한게 꽤 맞구만.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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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11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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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냉철한 엘리트가 나오는군
  2. 2010/02/12 14:2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동양은 논리적인 지성인,
    서양은 감성적인 문필가 타입이로군?!

    뭐지!!

데키마티오(decimatio)는 고대 로마 군대의 형벌이었다. 영어로는 decimation이며, '10분의 1형'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병사 10명 중엔 한 사람 꼴로 처형하는 방식이다.

10분의 1형은 결코 흔한 형벌이 아니었는데, 너무 잔인한데다 이를 너무 자주 실시할 경우 더 이상 공포감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자료는 드물지만, 모든 독자들이 데키마티오의 뜻을 알고 있다. 매우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나올 경우 (가령 항명이나 공황 상태), 군단 사령관은 10분의 1형을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장교 한 사람이 처벌 대상인 예하 부대로 간다. 제비뽑기를 통해 장교는 10명 가운데 1명을 처형할 자로 뽑는다. 살아남은 9명은 처형될 사람을 몽둥이로 죽이도록 명령받는다. 헬라스의 역사가인 메갈로폴리스의 폴뤼비오스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썼다.

트리부누스가 군단을 소집하여 계급을 이탈한 혐의를 물어 그들을 심하게 질책하고는 결국 제비뽑기로 위반자 가운데 5명, 8명 혹은 20명을 뽑는데, 사람 수는 비겁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사람의 10분의 1 정도로 잡는다. 제비뽑기로 걸린 이들은 사정없이 몽둥이질을 당한다. [...] 나머지 사람은 밀 대신에 보리를 식량으로 배급받으며, 숙영지 바깥 위험한 곳에서 진을 치도록 명령 받는다. 누가 걸릴 지 알 수 없으므로, 모든 이들이 그 무시무시한 제비뽑기에 걸릴 위험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보리를 지급받는 불명예를 모두 안게 되므로 이 관습은 잘못을 시정하면서도 공포를 일으키는 가장 좋은 방식으로 여겨진다.

- 세계사. 6.38.2-4

아마 10분의 1형은 폴뤼비오스의 시대에 그리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관습은 기원전 5세기에 기록이 남아있으며, 헬라스계 로마인 작가인 할리카르낫소스의 디오뉘시오스는 이를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형벌"이라고 부르지만, 알려진 사례는 몇 차례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원전 71년에 스파르타쿠스와 싸웠던 로마의 크라수스 장군(훗날 삼두 정치의 한 사람)은 사라진 이 형벌을 부활시켰다고 한다.

내전기에도 10분의 1형이 실시되었다고 하지만, 제정기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으며 제3 아우구스타 군단의 형벌(18년) 처럼 두어 번의 사례가 있었을 따름이다. 10분의 1형이 쓰였다는 가장 마지막 기록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이다. 이 형벌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 : livius.org (번역) article by Jona Lendering ©
http://www.livius.org/de-dh/decimation/decimatio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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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26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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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미션 하다가 decimate라는 단어가 있길래 찾아보다가 알게 되었지!
    개발살 났다는 뜻으롱 의외로 사용빈도가 높더군!
  2. 은구기
    2010/01/26 02:5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로버트 필머의 <가부장> 에도 등장하는 가부장의 막강한 권한을 또한 살펴야 하지 않겠나. 시위하던 아들을 끌고가서 죽여버리는데도 동료들은 아무 말을 못했다는 필머의 전언.

헤로도토스와 인과 관계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보고하는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에 관심을 가졌으며, (어느 정도는) 호메로스와 같은 관심사를 보였다. 전설적인 시인 호메로스는 다음과 같은 요청으로 일리아스를 시작한다.

 

노래하라, 여신이여, …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수많은 용감한 이들이 이를 명계로 보냈으며 이렇게 제우스의 조언은 아가멤논 과 위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으로 서로 갈라서면서 실현되었다. 신들 가운데 누가 이들을 싸우게 하였는가?"  

 

호메로스는 직접적인 원인(신들 가운데 누가 이들을 싸우게 하였는가?’)와 더 깊은 원인(’제우스의 조언은 실현되었다’)을 인식했다. 이제 살펴보게 되겠지만 헤로도토스도 이처럼 직접적인 원인과 더불어 더 심원하고 신적인 원인을 구별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개념들을 영웅간의 싸움이 아닌 전쟁을 설명하는데 이용하였다. 호메로스는 그러한 전쟁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그에게 트로이아 전쟁이란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는 실제 연극의 무대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이 분노로 큰 슬픔이 생겼는데, 제우스가 그러길 원하였기 때문이며, 그 전쟁 자체의 원인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호메로스는 헬라스인들과 트로이아인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싸우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전쟁의 원인에 관하여 많은 것을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그의 특별한 관심사로 아르키다모스 전쟁(기원전 431~421)이 발발한 당시에 그가 역사를 썼음을 기억한다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는 머릿글에서 자신의 관심사를 언급한다.

 

"여기서 할리카르낫소스의 헤로도토스는 두 가지를 위하여 자신의 관찰에 따른 결과물을 출간하였다. 첫 번째는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함이요 … ‘’그리고 두 민족이 어떻게 충돌하게 되었는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 다음으로 헤로도토스는 당대 시인에게서 들었을 어떤 전설 이야기를 말하는데, 그는 동방과 서방간의 전쟁들이 일어난 원인에 대한 헬라스의 전설을 제시하고, 페르시아와 포이니케(페니키아)의 기록(이 이야기는 아마 할리카르낫소스의 선창가나 지중해 연안의 어떤 도시에서 전해 들었을 것이다)을 덧붙인다. 아마 호메로스를 모방한 점도 있을텐데,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는 모두 사로잡힌 여성과 관계가 있는데, 빼앗은 여성을 두고 벌이전 싸움은 일리아스의 첫 권에서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 5장에서 헤로도토스는 갑자기 주제를 바꾸어 버린다.

 

페르시아인과 포이니케인들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보다는 나는 내가 아는 바에 따르고자 하며, 처음으로 헬라스인들에게 해를 입힌 자에 대해 밝히고자 한다.”

 

헬라스인들에게 처음으로 해를 입혔다는 그 사람은 뤼디아의 임금 크로이소스로, 그는 아시아에 있는 헬라스의 도시들을 정복하여 이로써 공격과 반격이 맹렬히 반복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크로이소스는 헬라스인들에게서 승리한 뒤로 자만하게 되어 무분별하게도 페르시아인을 공격했다가, 페르시아인들이 보복하여 뤼디아와 헬라스 신민들을 정복하게 되었다.(기원전 547년 추정) 한 두 세대 이후 헬라스인들이 아테나이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페르시아인은 반란을 진압하고 복수를 갈망하여 아테나이인들을 공격하였다가 마라톤에서 패배하였다. 페르시아인들은 복수를 다짐하였으나 480년의 크세륵세스의 원정은 대패로 끝나고 이제 헬라스인들이 공격하게 되었다.

 

현대 독자가 보기에 이는 너무 단순하다. 모든 인간사가 이처럼 작용-반작용의 양상에 따라 결정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이 사건들에 대해 호메로스의 시가에선 찾아볼 수 없는 좀 더 정교한 해석을 내리는데, 의심할 나위 없이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인들의 제국주의 근성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편집 원칙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수 있다. 페르시아는 뤼디아인, 바뷜로니아인, 인디아인, 아이귑토스인, 스퀴타이인(스퀴타이 전체를 정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트라케인(트라키아인)을 차례로 정복하였으며, 이내 헬라스인들은 이렇게 팽창한 페르시아 제국과 싸우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제국주의가 전쟁이 진짜 원인이다. 헤로도토스는 사람들이 왜 전쟁을 벌이는가를 최초로 물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하여 추상적인 답변을 최초로 내놓았다.

 

인과 관계의 이러한 두 차원은 인간에 의한 것들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사상에는 호메로스처럼 인과 관계에서 제3의 원인인 가장 심원하고 종교적인 층위가 있다. 헤로도토스는 한 발 더 나가 신들이 인간의 행복을 질투하는데, 강력한 의지는 그 역량을 뛰어넘어 행동하여 파괴되도록 시험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들은 다시 인간적 위대함을 이루게 될 한계를 뛰어 넘도록(헬라스어: 휘브리스) 인간들을 시험하여, 이 가장 위대한 왕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페르시아 임금 캄뷔세스가 아이귑토스에서 행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아이귑토스를 정복한 뒤, 캄뷔세스는 분별을 잃고 신성한 아피스 소에 해를 입히고(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지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동생 스메르디스를 처형하도록 명령하며, 누이 두 명과 근친 관계를 맺고, 신하의 아들을 죽이며, 열 두 귀족을 생매장하고, 아이귑토스의 무덤과 미라를 더럽히기에 이른다. 헤로도토스가 보기에 캄뷔세스는 분명 어떤 선을 넘어선 것이다. 캄뷔세스의 죽음 부분에서 그는 이것이 신의 징벌이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페르시아의 마고스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캄뷔세스는

 

그는 불충한 마고스를 토벌하러 수도로 빨리 진군하고자 말에 뛰어 올랐다. 그러나 그가 말등에 오를 때 칼집에서 칼자루 머리가 빠져나오면서 칼날이 삐져나와 그의 허벅지에 찔렸다. 부상당한 부위는 예전에 아이귑토스의 신성한 황소인 아피스를 찌른 바로 그 부위였다.”

-         역사 3 64

 

헤로도토스만 신학적인 측면에서 인과 관계에 대해 생각한 사람은 아니었다. ‘휘브리스가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은 왕들의 몰락과 뒤이은 왕국의 재앙에 대한 경건하고 전통적인 설명이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신들도 이러한 법칙에 종속되어 있으며, 신을 향한 인간의 경건함으로 인간이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뤼디아의 신실한 임금 크로이소스는 남들과 견줄 수 없이 많은 선물을 아폴론 신과 델포이 신탁에 봉헌하였으나 페르시아인들에게 패하였으며, 그는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 헬라스 신들의 버릇인지 신들에게 물었다. 델포이의 신은 그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가 뤼디아 왕가의 몰락을 자신의 시대가 아닌 자기 아들의 시대에 일어나길 바랐으나 그는 운명의 흐름을 바꿀 수 없었다.

  

출처: livius.org (번역)

http://www.livius.org/he-hg/herodotus/herodotus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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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은구기
    2010/01/19 15:46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근성! 뭘 번역한거지!
    • 공산
      2010/01/20 15:02
      댓글 주소 수정/삭제
      아 귀찮. 뒷내용은 읽기만 하고 번역은 때려치움.
  2. 은구기
    2010/01/26 02:5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니 근성의 원어가 무엇이냐는 질문이지.
    • 공산
      2010/01/26 14:27
      댓글 주소 수정/삭제
      원어라니?
    • 은구기
      2010/01/27 00:16
      댓글 주소 수정/삭제
      여기 제국주의 근성이라는 표현이 나오거늘 네 어찌?!
    • 공산
      2010/01/2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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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이 글 원문에는 'no doubt, the Persian Wars were caused by the imperialist habit of the Persians'으로 나온다. 근데 헤로도토스 본인의 글에서 페르시아의 호전성 따위에 대해 얘기한 것이 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군.
  3. 은구기
    2010/01/28 19:4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부르디외의 habitus를 '근성'으로 번역함이 옳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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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작은 창고. 시간은 오후, 창 밖엔 비가 내리다. by Plin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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