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하는 게 너무 어렵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 가리는 게 아직 안되는 듯.
중국현대사상론 - 리쩌허우(이택후)
1. 계몽과 구망의 이중 변주
1915년 '청년'(이후 '신청년')에서는 천두슈를 위시하여 여러 사람들이 각종 논설과 백화
시문을 내놓아 공자와 전통 도덕을 처음으로 전면적으로, 맹렬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도덕 혁명과 문화 혁명을 내세운 신문화 운동이 일어났다. 사실
이 운동은 탄쓰퉁, 옌푸, 량치차오 등 이전 단계에서 추구한
계몽 운동의 연장이었으나, 신문화 운동의 계몽 요구와 주장의 철저성,
전체성은 이들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당시 민족 모순과 계급 투쟁 등 절박한
사회, 정치 현실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환경 역시 이것이 하나의 '운동'으로 널리 주목받고 퍼진 요인이었다. 그러나 정치 투쟁(혁명)이 계몽과 문화를 압도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신해 혁명으로 황제 권력이 무너지고 낡은 봉건 사고도 권위를 잃었으나 정국은 엉망으로 치달았고 사상의 혼란이
극심하며 이념의 공백 상태가 나타났다. 또 기존의 체제와 문화가 무너지면서 강력한 보수, 완고 세력이 공자와 경서를 강조하고 황제권을 부활하는 등 시대착오적인 풍조도 나타났다. 젊은 지식인들도 대부분 이렇듯 막막한 현실 앞에서 침묵하였다.
이런 가운데 천두슈가 가장 먼저 민주주의와 과학을 외친다. 천두슈는 1916년에 발표한 글에서 '다수 국민의 운동'을 제기하였다. 양무 운동이나 개혁,
혁명 운동과 같은 이전의 다수 국민의 운동은 반제나 반청조 같은 목적을 실현하고자 대중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그리하여 '다수 국민'은
민주적 권리도 얻지 못하고 자각적인 민주적 요구를 내걸지도 않아 자연히 소수 사람들만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1912년에 들어선 중화민국 역시 실질은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인민은 여전히 어진 황제나
청렴한 관리를 기대하는 마당에 어떻게 정치 진보나 국가의 부강을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민중을 계몽하여 이들이 스스로 깨달아 민주주의를 쟁취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렇듯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삼강학설과 같은 전통 관념(윤리적 깨달음)과 반드시
결별해야 하며, 나아가 서구의 ‘자유, 평등, 독립 학설’이란
‘최후의 깨달음이 되는 깨달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고유의 전통을 버리고 서구 문화를 전반적으로 수입하자(全盤西化)는 것이 신문화 운동의 기본 특징이었다. 아울러 이 시기의
선진 지식인들은 더 이상 정치가 아닌 문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천두슈는 ‘청년’ 잡지를 출판하면서 이런 점을 분명히 밝혀 ‘시정을 비평하는 것이 宗旨가 아니다’라고 쓴 바 있다. 또 신문화 운동의 여러 주도 인물들은 앞 단계의 캉유웨이, 량치차오, 쑨원, 황싱과 달리 운동 초기에는 정치적인 인물이 아닌 순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신문화 운동의 자아 의식이 결과 정치가 아니라 문화에 집중되었다 하더라도
여기에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신문화 운동의 목적은 국민성을 개조하고 낡은 전통을 파괴하는 것으로, 즉 사회 진보의 기초를 이념적 사상 개조, 민주주의적 계몽 사업에
두고 있었다. 그 속에는 정치적인 요소가 명확하게 혹은 은연중에 개입되어 있었다. 즉 계몽의 목표, 문화의 개조, 전통의
포기는 여전히 국가와 민족을 위해, 중국의 정치와 사회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또 신문화 운동은 ‘천하의 일을 자기 일로 생각하는’ 중국 사대부의 고유한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외세에 저항하고
부강을 추구하는 중극 근대의 구망(救亡)의 주된 흐름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것들은 결코
개인의 ‘천부적 권리’, 즉 순수한 개인주의적 자유, 독립, 평등을 쟁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따라서 본래 개인주의의 기초 위에서 세워진 서구 문화를 소개하고 수입하여 전통을 타도하고 공격할 때에도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지니고 있던 위와 같은 집단주의적 의식과 무의식과 더불어 국가 대사와 백성의 고통에 대단한 관심을 쏟는 사회, 정치 의식과 무의식적 전통에 부딪혔다. 5.4 전후에 공자가 격렬히
공격받은 까닭은 위안스카이나 장쉰 등이 자신의 황제 체제 부활의 도구로 공자를 이용한 탓도 있었다. 이
밖에도 전통 학문에 정통하던 지식인들이 철저히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려 한 것은, 중국
문화에는 종교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어 맹족적인 신앙의 속박을 받지 않고 자기 개선을 적극 추구(自强, 日新 등)할 수 있었으며, 모든 것에 대해 이성적으로 고려함을 자기 개선의 표준이나 귀결로 삼았던 것과 관계가 있다. 즉 전통적이건 외래적이건 모두 인간의 이지(理知)에 따라 재단, 판결하고 선택, 사용하는 실용이성(實用理性)은 중국인이 수천 년 동안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기본 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흥미롭게도 공자와 유교에 반대하던
이들 지식인들이 의식하건 하지 않건 여전히 국가 대사와 백성의 고통에 관심을 쏟는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자신의 임무라 생각하는 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렇듯 계몽의 여러 목표를 삼고 전통을 비판하는 특색을 지닌 신문화 운동은 5.4 운동을 계기로 구망을 위한 반제 정치 운동과 만나 거대한 기세를 이루었다.
5.4 운동 전부터 학생 애국 운동은 중국에서 뿌리가 깊었는데, ‘천하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라는 말처럼 유교적 윤리 의식이 그 밑바탕을 이루었다. 1918년 학생들은 신문화 운동과 병행하여 신조사, 국민사 등 유명한
애국 구망 단체를 조직하여 반제 구국을 선전했다. 신문화 운동의 핵심 인물과 원래 애국 반제 운동을
한 사람들이 하나로 합쳐져 5.4 운동의 지도층을 이루게 되었는데, 따라서
당초 정치과 거리를 두고자 했던 신문화 운동의 주장은 결국 정치 투쟁으로 되돌아왔다. 계몽이라는 주제, 과학과 민주주의라는 주제는 다시 한 번 구망, 애국의 주제와 충돌하여
서로 뒤엉켰고, 발걸음을 함께하게 되었다. 당초 계몽이 구망에
곧바로 파묻힌 것은 아니었다. 이후 잠시간 계몽 운동은 구망 운동의 힘을 빌어 그 위세를 키워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중소 도시로 널리 퍼졌다. 또 계몽은 구망에게 사상, 인재, 대오를 마련해 주었다. 두 운동의 결합은 마침내 중국 전체의 지식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다른 한편, 학생 애국 운동이 전례없이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정부와 정부가 옹호하는 낡은 전통의 권위와 통제에 충격을 가하여 계몽이 확대되도록 길을 터주었다. 이들은 전통의 그물을 뚫고 서구 문화를 소개하고 봉건 사상을 공격하여 개인의 자유, 독립, 평등을 쟁취한다고 말하였는데, 원래 서구 개인주의로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적 집단주의를 대체하려고 한 것이 바로 천두슈가 1916년에 내놓은 신문화 운동의 주제였다. ‘가족분위주의’를 바꾸고 전통적인 윤리를 부정하자면 우선 ‘효’를 부정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 체제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충군’(忠君)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지만, 민국 이후에도 ‘忠’의 윤리가 잔존하고 있었는데, 이 ‘충’은 ‘효’ 윤리가 지탱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지식인들은 ‘효’를 공격하기 위하여 첫째로 계몽적인
방법으로 개인을 대가족에서 해방시켜 자유, 평등, 독립의
지위와 권리를 추구하게끔 하고, 둘째로 ‘효’가 ‘충’의 기초임을 폭로해야
했다. 이 두 방법은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 비판할 때에는
긴밀하게 뭉쳐 있었다. 천두슈는 ‘효’가 가족을 비호하여 개성을 희생시키고 전제 정치의 기초라고 공격하는데, 특히
‘가까이는 부친을 섬기고 멀리는 군주를 섬긴다’는 유학의
삼강오륜에서 효와 충이 내재적인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순자의 학문’(荀學)을 크게 매도하면서 ‘명교’(名敎)가 인간성을 말살하고 군주를 위해 복무한다는
탄쓰퉁의 비판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다. 다만 직접 공자를 공격하여 비판이 더욱 철저하고 격렬해졌으며
정치 비판과 개성 해방이라는 두 주장 가운데 개성 해방이 훨씬 두드러졌고 아울러 개성 해방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젋은 세대 지식인의 행위 양식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앞 세대 선진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가족 제도를 격렬하게
비판하고 부정하였으나 행위상으로는 여전히 가족에 대해 전통 규범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5.4 이후 청년 세대는 처음으로 서구식 변혁을 용감하게 실천하고자 했다. 가족
전통에서 벗어난 혼인의 자유나 여성 단발, 남녀 공학 등 여성 해방이라는 관념 혁신은 개성 해방의 문제인
동시에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성 해방으로 정치적 압제, 간섭에
타격을 입혔고 보수적인 도덕 옹호자들은 이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반항 외에도 당시 상당한 특색을
지닌 행위 양식은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서로 연계를 맺고 단체를 조직하여 진리를 추구하고 이상을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신민학회’, ‘소년중국학회’, ‘각오사’, ‘신조사’, ‘국민사’, ‘공학회’, ‘공학회’ 등 각종 소규모 단체들은 새로운 이상 사회를 실천적으로
지향하였다. 당시 청년들은 모더니즘의 당혹감, 고독감, 귀속 의식의 상실 같은 것이 없었으며, 반항하기 위한 반항, 순전히 비판적이거나 파괴적인 훼손을 꾀한 것도 아니었으며 미래를 낙관하며 긍정적인 이상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각종 사회주의가 청년 단체에서 유행하였다. 이들은 당시
어둡고 낙후된 중국의 현실을 초월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선진적이지만 해결해야 할 수많은 병폐를 안고 있던 당시 서구 자본주의 역시 초월하고자
하였다. 사회주의의 아름다운 이상에 경도된 청년들은 공독호조단이나 신촌 실험과 같은 이상 사회를 실험하였다.
결론적으로 가정에서 뛰쳐나온 개인의 반항과 이상 사회를 조직하려는 집단 의식은
통할 수 없었다.
2. 계몽의 구망 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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